한국 여자야구의 현재이자 미래인 이슬. (사진=스포츠춘추 황혜정 기자) [화성=스포츠춘추]
이슬. 이름부터가 특별하다.
메마른 땅에 조용히 내려 생명을 깨우는 물방울처럼, 이슬(17·동원고2)은 한국 여자야구 국가대표팀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말보다 행동으로, 눈에 띄지 않는 헌신으로. 그렇게 이슬은 지금 여자야구 향후 20년을 책임질 미래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 생애 첫 국가대표로 선발된 이슬은 허일상 대표팀 감독으로부터 “기량이 가장 크게 늘은 선수 중 하나다. 향후 우리나라 3루를 20년간 책임질 재목”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그 성장은 혼자의 힘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늘 묵묵히 뒷바라지해온 '가족'과, 조용히 손을 내밀어준 ‘진짜 언니’가 있었다.
이슬은 매주 주말, 대표팀 훈련을 위해 경상남도 통영에서 경기도 화성까지 3시간 30분이 넘는 거리를 이동한다. 오전 훈련을 위해 새벽 4시 30분이면 출발해야 하는 일정. 아버지는 핸들을 잡고, 어머니는 옆자리에서 딸의 간식이며 장비며 컨디션이며 세심하게 챙긴다.
“저는 차에서 자고, 아빠는 운전하시고, 엄마는 옆에 앉아 계세요. 매주 이렇게까지 따라와 주시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요.”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감사와 무거운 책임감이 담겨 있었다.
이슬의 야구는 그렇게 ‘가족의 시간’ 위에 자라났다. 혼자 이룬 성장은 아니었다. 지난 겨울에는 엘리트 남자 고교 야구부인 배재고와 함께 훈련을 했고, 방학 중에는 친구들과 크로스핏을 병행하며 몸을 만들었다. 타격에서는 대표팀 허일상 감독과 장지훈 타격코치의 지도를 받아 백스윙 동작을 교정하며 콘택트 능력을 높였고, 장타에 대한 욕심을 줄이며 정확도를 높이는 데 집중했다.
대표팀에서의 적응도 수월했다. 낯을 가리는 성격 탓에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그에게는 따뜻하게 다가온 선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대표팀 포수 김해리(32)다.
여자야구 대표팀 포수 김해리. (사진=스포츠춘추 황혜정 기자) 김해리처럼 머리에 열을 식히고 있는 이슬. 부끄럽다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사진=스포츠춘추 황혜정 기자) 김해리는 “슬이를 처음 본 건 2023년도 창원에서였는데, 그때 배팅을 엄청 잘하길래 저 친구가 ‘대표팀에 오면 정말 잘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2024년 대표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김해리는 말이 적은 이슬이 더 활발하고 자신감 있게 야구를 하길 바랐다. 그래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먼저 장난치며 다가갔다. 이상한 사투리도 일부러 썼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된 장난기 어린 접근은 어느새 정이 되었고, 김해리는 “그 계기로 애틋한 사이가 됐다. 그런데 나의 후배 사랑이 쌍방(?)일지는 모르겠다”며 웃었다. 둘의 관계는 다행히 '쌍방'이었다. 이슬에게 김해리는 단순한 선배가 아니었다. 대표팀 안에서 웃게 해주고, 말 수를 열게 해준 ‘든든한 언니’였다. 그 따뜻한 연결 덕분에, 이슬은 또래는 물론 선배들과도 점차 가까워졌고, 경기에서도 더 활발한 플레이를 보여줄 수 있었다.
3루수비를 보고 있는 이슬. (사진=스포츠춘추 황혜정 기자) 현재 이슬은 체대 입시도 병행하고 있다. 체육학과 또는 체육교육과 진학을 목표로 하며, 기본 체력 훈련도 함께 이어가고 있다. 롤모델은 탬파베이의 유격수 김하성. “깔끔한 수비와 좋은 타격 매커니즘을 닮고 싶다”고 말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슬은 지금,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다. 새벽을 여는 부모님의 차 안에서, 장난으로 시작된 선배의 마음에서, 그리고 묵묵히 이어가는 훈련 속에서. 이슬이 ‘이슬’처럼 메마른 경기장 위에 조용히 내려 새로운 생명을 틔우고 있다. 바로 한국 여자야구의 창창한 미래 말이다.